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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3-08 09:48
체 게바라를 만나는 여정
 글쓴이 : 나마스떼
조회 : 200  

지난 2월 9일 우리 일행은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가운데 조심스레 인천 공항을 출발, 멕시코와 과테말라, 쿠바를 향했다. 26일 귀국 전에는 이 사태가 마무리되어 있기를 기대하면서. 일행은 이대표님까지 모두 8명, 대부분 구면의 숙녀분들이어서 여정은 내내 가족처럼 편안하고 즐겁게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중미 국가들의 치안 상태를 들어 여행이 위험하지 않는가 걱정하기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 내내 신변의 위험을 느낀 적은 전혀 없다. 밤늦은 시간 홀로 아무데나 쏘다니지 않는 한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가 여행한 중미 국가들 모두 스페인의 침략으로 인해 많은 원주민들이 학살되고, 제국주의의 발톱에 할퀴어지고,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원주민과 흑인 노예의 후손들은 계속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지금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둠을 찾을 수 없었다. 남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며, 긍정적인 태도로 삶을 즐기는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중미 여행에 나선 것은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떽쥐베리와 더불어 내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이 굵은 야성적 인물이면서도, 예민한 감수성을 함께 지녔다. 또 용기있고 이름처럼 정직하게(에르네스토 게바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았다. 어떤 역경에도 자신의 영혼이 가리키는 길을 불굴의 의지로 끝까지 당당히 걸어갔다. 그 중에 먼저 체 게바라의 얘기를 나누고 싶다.

체 게바라를 빼고 쿠바를 말할 수는 없다. 쿠바의 거리 어디서든 체게바라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산타 클라라는 체 게바라의 도시라고 불린다. 그곳에 가면 그의 유해가 안치된 기념관과 그가 바티스타 정부군의 무기 수송을 막고자 불도저로 선로를 끊어 열차를 전복시킨 전적지 등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중남미 여행을 통해 제국주의에 의해 핍받받는 가련한 민중들의 현실을 보고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혁명에 나서기 전까지 쿠바가 처한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스페인인들의 아메리카 대륙 진출에 관문 역할을 한 쿠바에는 당시 약 11만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정복자들의 학살로 인해 1550년 경 3천 명으로 줄었고, 1560년 경 거의 전멸했다. 스페인 군대와 일부 선교사들은 소위 진보와 문명화와 기독교 사업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쿠바를 피로 물들였다.

체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파블로 네루다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인 라스카사스 신부는 1542년 그의 저서 '인디아의 파괴에 대한 보고서'에서 그가 직접 목격한 참상들을 고발하고 있다. '병사들은 단지 재미로 인디오들의 귀, 코, 손을 잘랐고, 안전을 약속해 불러들여 불태워 죽였다. 젖먹이 어린애를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축구공처럼 찼다. 군견을 동원해 사냥하고, 그들을 죽여 시체를 군견의 먹이로 던져주었다.'

신부는 스페인 국왕에게 '인디오들도 인간이며, 하느님의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실질적인 조치는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귀족계층에게 더욱 심한 박해만 받게 되었다. 콜롬부스가 도착한 10월 12일을 미국은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과연 이날이 경축할 만한 날인가?
인디오들이 거의 전멸하자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온다. 스페인인들은 흑인 여성 노예들을 성 노리개로 취급했고, 그 결과 부계는 백인, 모계는 흑인인 일방적 혼혈인이 양산된다. 인디오, 스페인인, 흑인, 이들 사이의 다양한 혼혈인 메스티조, 믈라토, 삼보 등이 출현했고, 19세기 이후 중국, 일본, 필리핀 등 아시아계 이민까지 더해져 쿠바는 거의 인종 박물관이 되었다.

1898년 아바나에서 정박 중이던 미국 선박 메인호에서 원인 미상의 화재가 났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책임을 돌려 선전포고를 했다. 냄새가 솔솔 풍기지 않는가? 미국의 승리로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쿠바는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1902년까지 미 군정이 실시되고, 양키들로 주인이 바뀌었을 뿐 쿠바 민중들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미국의 꼭두각시인 바티스타 정권의 독재 아래 여전히 민중들의 자유와 권익이 짓밟혔다.

1956년 11월 26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82명의 쿠바 해방군은 나무 요트 그란마를 타고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출발했다. 12월 23일 쿠바에 도착했으나 정부군의 거의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대부분 전사하거나 체포되고 겨우 12명만 살아 남는다. 체도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숨어들어 게릴라 활동을 펼치며 혁명군을 모으기 시작한다.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1958년 12월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혁명을 완성한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부패한 정부군이 쉽게 투항한 때문이기도 하다.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 체는 부동의 2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권력과 부에 연연하지 않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 전선으로 달려간다. 그때 동지 피델에게 당시 심경을 담아 보낸 편지가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산타 클라라의 기념관 위 석상에 새겨져 있다. '지구상의 다른 곳에서 나의 미천한 힘을 요구하는군. 자네는 쿠바의 영도자로 남아 책임을 다해야 하니, 이 일은 내 몫이라 생각하네. 나는 내 사랑하는 것들 중 가장 사랑하는 것을 여기에 두고 떠나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결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달려갈 것'이라던 그의 외침처럼 그는 불굴의 의지를 보이며 아프리카의 또 다른 혁명 전선에 뛰어든다.
 
당시 콩고에서는 독립 영웅 루뭄바를 추방하고 정권을 잡은 모부투 세세세코가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독재를 일삼고 민중을 탄압하고 있었다. 체는 말했다. '세계의 모든 자유인들은 콩고에서 일어난 반인륜적 범죄를 결코 용서해서는 안된다. ...... 서구 문명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하이에나와 자칼의 날카로운 발톱들이 가련한 우리 형제들을 갈기갈기 찢고 있다.'

그러나 쿠바 혁명 후 아프리카 콩고 전선에 달려간 그는 큰 좌절을 맛보고 1966년 쿠바로 돌아왔다. 여건의 미비와 혹독한 날씨 등 악조건, 부족들 간의 반목과 내분으로 인하여 그는 더 이상의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콩고 원정이 전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좀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와 함께 싸웠던 동지들에 의해 30여 년을 이어온 모부투 독재가 종식되고 만다.

그가 눈길을 돌린 것은 볼리비아 전선이었다.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미국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으려 했던 소련에게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고, 미국은 중남미의 다른 곳에서 다시 그들의 영향력을 상실할 것을 경계했다.
그런 와중에 볼리비아 공산당의 비협조가 결정적이었고, 피델의 원조도 실현되지 않아 체는 위기로 내몰렸다. 그는 심한 천식 발작에 설사까지 겹치고, 식량과 식수도 부족한 상태에서 최악의 행군을 하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 물을 마시기 위해 협곡의 개울가로 내려왔을 때 한 농부가 이를 보고 밀고하였다. 결국 CIA의 사주를 받은 수백 명의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총상을 입고 대원들과 함께 체포된다. 결국 1967년 10월 9일 총살당했다.

간혹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갇힌 인물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그는 엄청난 독서광이었고, 어머니로부터 시적 감수성을 물려받았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도 시를 읽고 썼다. 그가 추구한 것은 핍박 받는 민중들을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궁핍을 해소하려는 것이었지, 이데올로기로 정의내리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로맨티스트이며 휴머니스트였다.

그는 곧잘 예수와 비교된다. 그가 구원하고자 했던 민중의 밀고로 최후를 맞은 것도 제자에게 배신당한 예수와 흡사하다. 사망 당시 모습이 예수와 흡사했다는 증언도 있다. 끝까지 그는 의연하고 당당했다. 그의 강렬한 눈빛에 형을 집행해야 할 병사가 쉽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주저하기도 했다.'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겠다'던 혁명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그의 나이 39세였다.

그가 쿠바를 떠나 위험한 전선으로 다시 떠난 것에 대해 피델과의 절교설, 심지어 피델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당시 정세로 보아 피델의 원조 시도를 소련측이 압력을 행사해 막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유해는1997년 32년 만에 쿠바로 돌아와 산타 클라라의 기념관에 안치되었다. 볼리비아 정부가 정보를 철저히 차단했고,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 행방을 찾기 어려웠다. 아르헨티나와 쿠바인으로 구성된 조사팀의 끈질긴 추적 끝에 기적적으로 바예그란데 인근의 공동묘지에서 유해를 발굴했다.

현대의 체게바라 열풍을 이끌어낸 데에는 쿠바의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 큰 역할을 했다.1960년 3월 5일 화약 폭발 사고로 사망한 136명의 희생자에 대한 추모식에 참석한 체게바라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검은 베레모에 긴 머리칼, 덥수룩한 수염, 열정적인 눈빛의 바로 그 사진이다. 그가 이 사진에 대해 저작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면서 이 사진은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 열풍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사진가를 격노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난다. 2000년 영국 음료회사 디아지오 그룹이 새 보드카 광고에 이 사진을 이용한 것을 보고, 그는 저작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섰다. 체의 얼굴을 보드카나 파는 데 이용하는 것은 체게바라의 이름과 기억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라 느낀 것이다.

그 밖에도 영국 맥주 회사가 '체 맥주'를 출시하고, 미국 아이스크림 회사가 '체리 게바라'라는 걸 출시했다. 스위스의 한 시계 회사도, 일본의 잔인한 폭력 비디오 게임도 그의 이름을 따 상품을 내놓았다. 이런 예들은 무수히 더 많다. 거대 자본의 횡포에 맞서 평생을 싸운 자신이 그들의 선전 도구로 전락한 사태를 그가 본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2008년 게바라 탄생 80주년을 앞두고 쿠바 정부가 주선한 인터넷 대화에서 체의 재혼 부인 알레이다와 두 자녀는 아버지의 명성을 지구촌에서 상품화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그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한때의 유행으로 단지 그의 반항아적 이미지나 낭만성을 겉모습만 모방하거나, 그의 명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처사에 대해 나 또한 강한 불쾌감을 느낀다.

사르트르는 그를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원숙한 인간'이라 칭송했고, 프랑스의 미테랑 전 대통령은 가장 충격적인 일을 묻는 질문에 '체게바라의 죽음'이라 답했다. 소심하고 나약한 소시민인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참 많이 가졌다. 불굴의 의지와 용기, 인류애의 순수한 영혼 등. 그는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라 행동하는 용기있는 지성이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유다. 그는 나와는 너무 다르다.

이정식 (20-03-08 11:13)
 
이선생님 안녕하세요
체게바라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행동을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생동감있게 정리해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체게바라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제가 이선생님 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이제야 그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서미에 '그는 나와 너무 다르다' 라고 표현하신 것은 너무 겸손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쿠바 여행이 이선생님의 여행수기 덕택에 비로서 완성이 된 것 같아 뿌듯합니다.
많은 부분 저의 부족함이 있었던 여행이었지만 이선생님과 모든 일행의 넓은 아량과 이해 덕택에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여정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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